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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여행

단종 유배지 청령포

Tree[나무] 2020. 4. 2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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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일치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절을 올리니
부디 내 절을 받으시오
이제 모두 저 세상 사람들이 된
충성스러웠던 사육신들...
그대들이 없는 조선의 앞날이
자꾸만 걱정이 되는구료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남한강 상류에 있다. 강의 지류인 서강(西)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서 마치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이다. 1457년(세조 3) 6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다.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가 있고 관음송(천연기념물 349)과 울창한 소나무숲 등이 남아 있다. 단종은 그해 10월 관풍헌에서 17살의 어린나이에 숨졌다.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휘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보호면적은 204,241㎡로, 영월군이 관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 청령포 [Cheongnyeongpo, 寧越淸泠浦] (두산백과)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비는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이다.

1448년(세종 30)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해 문종이 왕세자를 위하여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사(師)·빈(賓)들과 상견례를 행할 때,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에 즈음하여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신숙주(申叔舟), 이개·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이들이 측근에서 협찬하였다.

이해 윤9월, 저녁 강의에서 《논어》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묻자 박팽년은 “생각하는 바가 간사함이 없는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그의 학문이 정밀, 심오하여 경연에 강의할 때마다 자신의 배움에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조충(趙沖), 김취려(金就礪),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 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1453년(단종 1)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언18) 등 40명이 뽑혔다. 온성과 함흥의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허가하였다.

왕이 대신 황보 인, 김종서, 정분(鄭#분37) 등을 불러 그들에게 자문하여 박중림(朴仲林)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이해 10월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의 계책에 따라 무사를 거느리고 가서 좌의정 김종서는 그의 집에서 죽이고,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은 대궐에 불러와서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작은 아버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므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또,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의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우직(友直)은 조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강화의 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되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이 일련의 조처는 왕의 의사가 무시된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 인물들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이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정치의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하여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

한편, 양성지(梁誠之)로 하여금 《조선도도 朝鮮都圖》, 《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직집현전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는데, 이는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려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하여 알리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이었다. 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둔전(屯田)설치계획을 수립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제신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급박한 주변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복위사건의 주동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 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端宗)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으므로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은, 곧 이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행할 의무이기도 하였다.

이때 마침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하여 연회하는 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측근 세력도 제거한 뒤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동모자인 김질(金#질18)의 고발에 의하여 결국 실패하고, 이 사건의 주동인물 중 많은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단 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자,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매양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하여 복위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 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 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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